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푸아 운동 (문단 편집) == 몰락 == 이들의 수명을 잠시나마 연장시켜 준 것은 [[소련]]이었고, 결국 그들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도 소련이었다. [[겨울전쟁]]이 일어나 그 결과로 핀란드의 영토와 인구 10%가 소련에 할양당하자 IKL과 동조자들은 이것이 민주주의의 무능과 실패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계속전쟁]]을 대비하여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급격히 유착했고, 1941년 1월 IKL 총재 [[빌호 아날라]]가[* 코솔라는 1936년 주벽 때문에 쫓겨났고 술병으로 죽었다.] 운수공공장관으로 입각했다. 하지만 아날라가 입각한 [[유카 랑겔]] 내각은 전쟁 대비를 위한 국민대통합을 목표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입각한 거국내각이었기 때문에 IKL의 주장이 내각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IKL이 민주주의가 무용하다는 둥 떠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 총재를 장관으로 묶어놓은 것에 가까웠다. 과연 IKL은 그 다음 내각인 [[에드빈 링코미에스]] 내각에는 입각하지 못한다. 1944년 9월 19일 핀란드와 소련이 휴전했다. 소련은 가장 먼저 IKL을 해산시킬 것부터 요구했고 핀란드 정부는 그에 따랐다. 휴전하고 불과 4일 뒤의 일이었다. 한때 IKL의 지역적 기반이던 포흐얀마 지방의 주민들도 모조리 국민연합당이나 농업동맹(現 중앙당) 지지로 선회했다. 1958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이 출범했을 때 라푸아 운동 초대 총재 비흐토리 코솔라의 장남 닐로 코솔라가 농무장관으로 입각하자[* [[국민연합당]] 소속으로 연정에 참여했다.] 소련이 이것을 문제삼으며 단교 직전까지 가는 꼬장을 부렸다. 이 때 핀란드 농업동맹(현 [[핀란드 중앙당]]) 소속 대통령 [[우르호 케코넨]]이 파게르홀름 총리를 실각시키고 레닌그라드에서 "우연히" 만난 [[니키타 흐루쇼프]]와 독대하여 "오해"를 풀면서 사태를 해결했다. 이후 사회민주당은 한동안 입각을 못하다가 1966년쯤 가서야 다시 총리를 배출할 수 있었다.[* 파게르홀름 실각 이후 공백을 깨고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던 사민당원은 다름아닌 마우노 코이비스토(Mauno Koivisto, 1923~2017)인데, 그는 훗날 케코넨이 죽고 나서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고, 당시까지 대통령제에 가까웠던 핀란드의 이원집정부제를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형태로 개혁했다.] 냉전이 끝난 1993년에 IKL 이름을 내건 정당이 부활했지만, 원외 군소 정당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